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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 광적인 믿음과 미신의 힘 / 스피노자를 읽고

책과 생각

by 읽는자 2019. 11. 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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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를 찾아봤다

스피노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책 속 내용은 성서와 종교를 이야기하였는데,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기존에는 지식의 기준이나 옳고그름을 종교에 두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성과 종교를 이야기하였고, 종교가 점점 물러나면서, 인간 이성 홀로 서게 된다. 사람마다 이성이 다르기에 생각과 마음을 연구하고, 과학을 통해서 입증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나오면서, 기존에 과학에 맹신했던 것이 틀린 점도 발견되었다. 우리는 불안정해서 이성이 어디에 의존할까하다가, 인간은 때때로 미신에 의존하기도 한다. 스피노자 말하는 미신이 무엇이고, 광적인 믿음이 무엇일까? 단순한 종교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인간은 미신을 의존하는 존재 [신학-정치론]

두려움이 지속되는 한에서만 인간이 미신에 의존해 행동할 것이며 인간이 잘못된 종교에 빠지는 것은 오직 의식이 슬픔에 빠져 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는 사실, 즉 그것은 곧 환상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국가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때 흔히 점쟁이가 일반 백성을 지배하고 왕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람은 누구나 미신에 빠질 가능성을 선천적으로 안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모든 사람이 신성에 혼란스러운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정신의 모든 광적인 형태와 유혹적인 영감처럼 미신도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수시로 변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미신이란? [신학-정치론] [에티카]

미신은 희망과 미움, 분노와 거짓 속에서만 기반을 발견한다. 미신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욕망,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활동적인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다양한 종류의 미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인간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같은 정도의 불행에 직면하기 마련이어서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롭고 아직 미혹되지 않았던 것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불안정이 많은 혼란과 끔찍한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불안정은 종교의 모양을 하고 쉽게 사람들을 유혹해서, 신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왕을 숭배하게 할 수도 있고, 왕들을 저주하고 인류의 역병처럼 혐오하게 할 수도 있다.

 

 

성서는 낱말이다.

이 글을 읽고, 당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계몽주의로 이어갈 때, 스피노자는 성서비판을 하였다. <성서의 해석>에 들어가면 성서는 낱말이다. 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이 뜻은 성서 낱말을 가지고 여러가지 해석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낱말 그대로 보지 않고, 사람들의 해석에 휘말리게 된다. 이것이 종파들을 만들고, 사이비를 만들기도 한다.

 

스피노자와 현대사회

더이상 종교국가가 아닌데, 왜 스피노자를 봐야할까?
종교에 대한 믿음이 사회를 이끌었는데, 지금은 민주주의에서 믿음을 담아 정치에 투표한다. 똑같은 믿음이 있는 시스템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여기서 정치세력이 미신과 같은 정책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서로를 혐오하게 만들고, 원한을 만들고 있다. 나는 스피노자를 통해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 '자유' '평등' '균형' 등이 옳은 것이지만, 마치 종교처럼 떠받는 경우가 생기면 홀리게 만든다. 그리고, 낱말의 '자유''평등''균형'을 보지 않고, 이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예언가)의 해석을 보면서, 미신처럼 믿고 있다.

<외로운 남자>에서 아시다시피, 정의를 외치는 이는, 아무도 정의가 뭔지를 모른다고 비판한다. 평등을 외치지만, 자신의 인권을 올리고, 다른 사람을 내리는 모순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때로는 지식이나 교양을 찬양하며,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칭하면서 오로지 책으로만 둘러싸여 책속문구만 반복적으로 방패삼아 자신을 지키는 모습이 되기도 하고, 정치이념에 신념한 체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가족의 평화기반이 종교라고 종교에 심취해 모순적으로 각박한 가정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냥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보다는, 신은 있되 없다가 알맞는 말로 느껴졌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종교의 신보다는 광범위하게 니체의 '신'으로 보면 된다.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해석

우리 주변에 나의 믿음이나 바램에 맹신하는 모습이 있지 않은가? 그 믿음이나 바램이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은가? "ㅇㅇ 의 이름으로"라고 외치는 게 옳은 건가? 미신으로 바뀌는 신들이 아래에 있다.
종교, 교육, 학벌, 직장, 연봉, 문화, 정치, 법, 철학, 이념, 사상, 성별, 돈, 명예, 학문, 예의, 나이, 친구, 자유, 평등, 공평, 정의 등...

위에 같은 것들이 필요하냐 안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가 있어야하는 건 알지만, 예의를 강요하면 얼굴이 붉혀진다." 라는 말처럼 위 단어들을 생각하면 된다. 예의가 있어서 위계질서가 잡힌 것이라고 맹신하지 말라는 뜻이다. 과연 예의라는 말에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인사를 하는 예의나 웃어른에게 존댓말하는 예의가 왜 생겼는지를 알고, 시대에 맞게 법을 수정하기도 한다. 인사 왜 해요? 라는 질문에 '예의'다라고 해도, 딱히 정확한 답을 해주는 이는 없다. 앞서 말한 '정의'를 주장하는 이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거랑 비슷하다.

명절에 나오는 논쟁중 하나가 대체 음식준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가족이니까 해야지가 무엇인가 문화해석에 속은 것이 아닐까?

미신처럼 위 단어들을 광적으로 믿는 이들 때문에, 극단적인 결론으로 법적 제정까지 올라오며 결국 개인들의 자유침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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